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문단 편집) == 생애 == 셸링은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1775년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뷔르템베르크]] 주 레온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였으므로 15세의 어린 나이에 튀빙겐 대학의 신학과에 입학했고 거기서 다섯 살 위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 [[프리드리히 횔덜린|횔덜린]]과 기숙사를 같이 쓰면서 셋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이웃나라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혁명]]이 일어났고 보수적이었던 튀빙겐 대학의 정통신학에 맞써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몰두했다. 그들은 기존 기독교가 신과 세계를 대립시키고는 타락한 세계가 신에 의해 구원되기를 기다린다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학문적 목적은 신과 세계(피조물)를 화합시켜 하나의 결속된 전체를 존재하게 하는 사유의 탄생에 있었다. 이들에게는 죄를 통한 분리 대신에 사랑을 통한 통일이 중요했으며 대립하는 세계 대신에 결속된 세계가 관건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횔덜린의 제안에 의해 이른바 사유의 동맹을 결성했고 통일철학을 추구함으로써 자유와 이성과 사랑과 화해가 실현되는 통합의 나라를 꿈꾸게 된다. 17살 때, 창세기 제3장에 관한 학위논문을 쓰고 18살에는 《신화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 이어서 1년 뒤엔 《철학 일반의 형식의 가능성에 대하여》를 썼다. 이 시기에 셸링은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피히테]]의 제자라고 볼 수 있다. 1795년 20살 때 튀빙겐 신학부를 졸업한 셸링은 3년간 라이프치히에서 가정교사를 한다. 이때 자연과학에 몰두하면서 독자적인 철학을 구축한다. 그 결과 《자연철학 이념 ({{{-1 1797}}})》을 썼고, 이 생각을 더 발전시켜 1년 뒤 《세계영혼에 관하여 ({{{-1 1798}}})》을 출간했다. 바로 이 책을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매우 좋게 봤고, 이를 계기로 괴테는 셸링을 예나 대학 교수로 적극 추천하게 된다. 피히테가 1799년 무신론 논쟁에 휘말리면서 예나를 떠난 후, 셸링은 예나 대학의 중심점이 되며 1800년에는 전 독일 철학계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된다. 가정교사 생활을 전전했던 헤겔을 예나 대학 교수로 추천하여 헤겔과 같이 철학비평지를 편집하기도 하고, 슐레겔 형제나 노발리스 같은 낭만주의자들과도 친교를 맺은 것도 이 시기다. 이 때 나온 책이 《자연철학 체계 기획1({{{-1 1799}}})》와 그 유명한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 ({{{-1 1800}}})》인데, 여기서 마련된 객관적 관념론을 통해 셸링은 피히테의 철학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이후 '동일성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철학으로 셸링은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 무렵 A. W. 슐레겔의 아내 카롤리네(Caroline)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1803년 셸링은 남편과 이혼한 카롤리네와 결혼했으며, 그후 이들은 낭만주의 철학자들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예나를 떠나 뷔르츠부르크로 옮겼다. 셸링은 거기에서 얼마 동안 강의를 했고, 1806년 31세 때는 뷔르츠부르크를 떠나 뮌헨으로 간다. 셸링이 떠난 예나 대학의 중심이 된 헤겔은 1807년 《정신현상학》을 발표하였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발전시켜 절대적 관념론을 완성시켰는데, 그러면서 셸링의 동일성 철학을 사정없이 비판한다. 헤겔은 이후 셸링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셸링은 이 배신을 매우 슬퍼했다. 셸링은 헤겔의 절대 이성을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을 완전히 다른 체계로 바꾸었는데, 뮌헨에서 출판한 그의 후기 철학의 대표작 《인간적 자유의 본질 ({{{-1 1809}}})》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신의 선악에 대한 실존 문제를 다루고 있다. 1821년부터 5년간 에를랑겐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1827년에는 다시 뮌헨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쳤다. 1831년 헤겔이 죽고, 헤겔의 제자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빌헬름 4세]]는 셸링을 1841년 베를린 대학의 철학 교수로 임명한다. 여기서 [[쇠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엥겔스]], [[미하일 바쿠닌]] 등을 가르쳤으나 대부분의 제자들이 이미 헤겔의 철학을 숭상했기 때문에 강의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고, 다만 셸링의 실존 개념은 제자였던 키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후 퇴직해 뮌헨으로 돌아갔고, 1854년 그는 거의 잊혀진 채로 스위스 라가츠에서 죽었다. 《계시의 철학》과 《신화의 철학》이 사후에 출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